정유정은 끊임없이 악에 주목했다. 그러다 비로소 악을 정면으로 돌파했다. 그렇게 <종의 기원>을 관통한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새로운 문장을 떠올리고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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Q 히말라야를 다녀와 에세이 <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>을 썼다.
A <28>을 마치고 슬럼프가 와서 1년을 쉬었는데, 어차피 1인칭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으니 에세이를 쓰면 예행연습이 될 거 같아 히말라야에 갔다. 그렇게 에세이 초고를 쓰고 돌아오자마자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났다. 순례길이 시작되는 프랑스에서 산티아고까지 800km를 걸었고, 스페인 땅끝 마을이라 불리는 피니스테레(Finisterre)라는 마을까지 180km를 더 걸었다. 총 980km를 걸으며 40일 동안 <종의 기원>을 구상했다.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 사람들과 어울릴까 봐 동네 호텔을 전전하며 혼자 지내다 왔다.
Q 악인을 묘사한 전작들과 달리 <종의 기원>에선 악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한 차원 다른 각오가 필요했을 것 같다.
A 작품을 발표하면 찬사도, 비난도 모두 작가 몫이다. 조롱거리가 될 수 있다는 압박을 견디고, 내 문장에 책임을 져야 한다. 그게 두려웠다. 마지막까지 나를 짓누르더라. 하지만 그런 압박을 견디지 못하면 펜을 꺾어야 한다. 그래서 마지막까지 견뎌낸 나 자신이 대견하다.
Q 전작들과 달리 1인칭 시점의 화자만이 등장한다. 시점이 간결해졌다.
A 하지만 초고는 복잡하게 나왔다. 주인공이 완전히 죽더라. 유진이가 독자를 꼬드기며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는데 내가 끌고 간 거다. 그래서 복잡한 설정을 다 걷어냈다. 유진이를 뺀 나머지 캐릭터는 모두 병풍처럼 만들었다. 유진이의 인기를 빼앗아갈 수 있는 건 전부 감춰버렸다.
Q 거의 모든 사건이 복층 구조의 집 안에서 벌어진다. 전작에 비해 동선도 현저히 짧다.
A 2박 3일 동안 주인공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하니 이야기를 최소화시켜야 했다. 최소한의 인물과 최소한의 공간,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했다. 도입부부터 100페이지가량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거실에서만 오간 것도 그래서다.
Q 초반부에선 행위의 진전 없이 동어반복적인 심리만 묘사되니 질식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.
A 초반부는 쓰기도 힘들었다. 동어반복적으로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 과정이 나오는데, 사실 사이코패스는 이런 식으로 갈등하지 않는다. 하지만 유진이는 엘리트이고, 교육을 통해 본성을 억압한 부분이 있으니 이 정도 고민이 필요하리라 생각했다. 한편으론 독자들이 앞을 가늠할 수 없도록 묘사한 탓일지도 모른다. 주인공과 동등한 위치에서 상황을 인식하도록 서술해서 독자들은 빨리 책장을 넘기고 싶었을 거다.
Q 어떤 경우엔 사이코패스의 악함을 그리는 데 망설인다는 인상이 느껴지기도 한다.
A 어릴 적부터 학습된 윤리적 관념이 의외로 강고해서 사이코패스를 다루는 데 충돌이 생겼지. 목에 칼을 넣어보는 장면은 퇴고 과정에서 다섯 번 정도 지웠다가 살렸다. 필요한 묘사라는 걸 알지만 막상 내 윤리적 기준에선 과하게 느껴진 거다. 결국 도덕적 기준을 버리고 사이코패스의 관점에서 합리적인 기준을 찾고자 애썼다. 그러다 12월쯤에는 처음으로 달리듯이 써내려갔고, 4월까지 미친 사람처럼 달렸다. 그제야 이야기가 제대로 되는 기분을 느꼈다.
Q 가족 관계 안에서의 갈등을 방아쇠 삼아 사건을 격발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.
A 뭔가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사람을 찾다 보면 결국 가족밖에 남지 않는다. 타인을 위해 나 자신을 던지긴 힘들지만 엄마나 아빠는 자식을 위해 모든 걸 던진다. 결국 가족 간의 사랑, 애정에서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끌어낼 수 있다. 한편으로 가족은 가장 믿을 만한 아군이면서도 내 인생을 지옥으로 만드는 최악의 적이기도 하다. 그만큼 가족에게서 파생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.
Q 전작에 비하면 여성 캐릭터의 비율이 확실히 높아졌다.
A 원래 여성 캐릭터를 못 만들었다. <7년의 밤>의 강은주를 만들 때도 애를 먹었는데 <종의 기원>에서 엄마나 이모를 그리면서 자신감이 붙었다. 처음엔 아빠를 등장시킬까 했는데 그림이 안 나오더라. 엄마여야 끈끈한 감정이 전해질 거 같았다. 그래서 엄마를 잘 그릴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, 유진이에게 몰입하면서 엄마의 입장이 정리됐다.
Q 실제로 엄마라서 그런 건 아닐까?
A 돌아가신 엄마가 ‘타이거맘’이었다. 엄마 앞에서 ‘못해요, 힘들어요’라고 하면 한 대 더 맞았다.(웃음) 나를 강하게 키우려고 노력하셨다. 그런데 정작 본인은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. 갈등도 많이 하고 섬세했지만 나한테만 그랬다. 유진이 엄마도 여장부는 아니지만 유진이를 압박한다. 결국 내가 보고 자란 엄마 덕분에 캐릭터를 잡았다.
Q 실제로 본인은 어떤 엄마일까?
A 아들은 자유방임형으로 키웠다. 아들이 일본 오사카로 유학을 가서 3년을 살았는데 한 번을 안 가다가 <종의 기원> 초고를 쓸 때 처음으로 가서 밥을 해줬다. 저 하고 싶다는 대로 하게 두며 키웠다.
Q 엄마가 되니 엄마가 이해되던가?
A 엄마는 나를 의대에 보내고 싶어 했고, 기어코 간호대라도 보냈다. 숨이 막혔다. 내 인생을 꽉 틀어쥐고 있었으니까. 그래도 내가 비뚤어지지 않은 건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. 아무리 어려도 그건 보인다. 나를 사랑하는지, 미워하는지. 소설을 늦게 쓴 것도 엄마가 반대했기 때문이다. 그런데 만약 이른 나이에 소설을 썼다면 간호사 시절이나 직장 생활의 경험이 없었을 테니 어떤 소설을 썼을지 모르겠다. 운명이라는 게 참 재미있다.
Q 간호사 시절이 지금의 작가관을 만드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?
A 신경외과 중환자실에서 일했기 때문에 수많은 죽음을 지켜봤다. 간호사들은 그런 죽음에 휘둘리지 않고자 애를 쓴다. 상처를 받으면 힘드니까. 하지만 내가 본 숱한 죽음이 내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친 것 같다. 심지어 엄마도 내가 스물다섯 살 때 근무하던 중환자실에서 돌아가셨다. 간호사 생활 이후 이어진 심사평가원에서의 직장 생활도 소설을 쓰는 토양이 됐다. 그리고 간호학을 공부하며 생물학이나 해부학을 공부한 덕분에 섬세한 신체 묘사가 가능하다는 장점도 얻었다. 작가로서 수고를 던 셈이다.(웃음)
Q 아무래도 <종의 기원>은 세상으로 숨어들어온 악의 여운을 남긴다는 점에서 흉흉한 요즘의 세태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.
A 소설이 세상을 바꿀 순 없겠지만 세상의 불길한 징후를 보여줄 순 있다고 생각한다. <종의 기원>을 발표하고 시화호에 시체를 유기한 범인이 잡혔는데 소설 속 군도신도시가 시화호와 송도 신도시를 더한 가상 도시라 조금 놀랐다. 살인을 저지른 범인의 얼굴에서 살인범보단 이웃집 청년 같은 인상을 느꼈다. <종의 기원>은 우리 주변에 악이 존재할 수 있다는 여운을 남기는데, 그런 사건이 발생해서 개인적으론 흥미로웠다.
Q 영화 제목이 언급되는 작품이 많다. 이번에도 <시티 오브 갓>이나 <버킷 리스트>가 등장한다. 영화를 좋아하는 거 같다.
A 운이 좋은지 소설과 어울리는 영화가 곧잘 떠오른다. <시티 오브 갓>에서 뻐드렁니를 드러내고 깔깔대며 총질을 해서 사람들을 죽이는 꼬마가 나온다. 나는 그 모습이 웃겨서 웃었는데 옆에선 질색하더라. 화면에서 유혈이 낭자하게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나만 웃으니까 반응이 어긋난 거지. 그걸 사이코패스의 단서로 인용했다. 물론 나는 사이코패스가 아니지만.(웃음) 그런데 영화를 정말 좋아하지만 보지 않으려 노력한다.
Q 이유는?
A 시각적인 정보는 깡패다. 그대로 주입돼서 잊히지 않는다. 만약 영화에서 갇힌 방에서 탈출하는 장면을 본다면 나중에 그런 장면을 쓸 때 그 이상의 묘사를 떠올리기 어렵다. 그러니 안 보는 게 상책이다. 극복하기 힘드니까.
Q 자신의 평소 습관을 작품에 가져다 쓴 부분이 많은 거 같다.
A 사이코패스에게도 습관이 있을 텐데, 타인에게 빌려 묘사하는 데엔 한계가 있으니 내 습관을 쓰게 된다. 유진이가 거짓말을 잘한다고 수없이 말하는데 생각해보면 나도 어릴 때 어머니한테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잘했다. 결국 소설은 작가를 벗어나지 못한다.
Q <종의 기원>은 끔찍한 여운이 남는 결말까지 악으로 그득한 작품이다.
A 트위터에서 이런 글을 봤다. 나홍진과 정유정 좀 만나게 해달라고.(웃음) 정말 끝까지 내몰긴 했지. 그리고 탁월한 악인을 그렸다기보단 악의 존재를 정면으로 들여다본 셈이다. 그러니 노망이 나지 않는 이상 사이코패스가 주인공인 소설은 쓰지 않을 거다.(웃음) 다만 사회적인 악에 관해선 할 말이 많이 남았다.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행동을 악이라고 보는데, 그런 관점에서 사회적인 악인은 언제든 튀어나올 거다.
Q <종의 기원>을 쓰면서 애를 먹은 만큼 끝나고 나서는 속이 후련하지 않았을까.
A 기가 드센 소설이라 감당하기 어려웠고, 유진이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하면 어떡하나 두려웠는데 소설을 탈고한 다음 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. 너무 큰 충격을 받으니까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오게 됐다. 건강검진을 하러 2박 3일 정도 병원에 입원했는데 느닷없이 밤중에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. 한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실감 나질 않는다.
Q <내 심장을 쏴라>와 <7년의 밤> 사이에 작가로서의 기질이 달라졌다. 언젠가 또 다른 전환점이 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?
A 올해가 등단 9년 차인데 문인들은 보통 등단 10년 차까지 신인이라고 본다. 결국 내년이면 신인에서 벗어나는 셈이니 프로로서 원숙한 세계를 보여줘야 한다. <종의 기원>은 신인 작가로서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고, 악인으로선 극단까지 그려봤으니 하나의 매듭을 지었다고 본다. 내 소설의 테마는 인간의 본성이라 할 수 있는데 인간의 본성엔 악만 있는 게 아니니까 아마 다른 형태의 인간 본성을 그릴지도 모르겠다.
Q 혹시 차기작으로 구상한 이야기가 있나?
A 재난 소설을 구상하고 있다. 아마 사회나 국가가 개인을 망가뜨리는 상황을 그릴 거 같다. <28>이 자연재해를 다뤘다면 차기작은 인재를 다룬 이야기일 거다.
Q 스케일이 큰 작품이겠다.
A 소설을 쓰려면 형식을 장악해야 하는데 아직 장악하지 못해서 요즘엔 생각이 많다. 이야기와 개요는 머릿속에 있는데 이 이야기를 어떻게 자리 잡고 전개할지 고민 중이다. 아마 내 소설 가운데 최초로 판타지 설정이 나올지도 모르겠다.
EDITOR : 민용준PHOTO : 전영상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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